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視覚芸術家ソ・ダソムの連載 「Texture」第四回

2023年も早いものでもう2ヶ月が過ぎてしまいました。今日から3月。ソウルもだいぶ暖かくなってきたようです。ダソムの連載、第四回目の原稿が届きました。今回はファッションの街として、卸売の問屋街とファッションモールが混在する東大門市場がテーマです。その歴史と創作時にダソムが通う東大門総合市場について、じっくり語ってくれています。and recipeでも東大門総合市場の中にある縫製工場のお母さんたちと商品を作りたいと計画中。ものづくりをする前に、その場所の背景を知ることはとても大切なこと。私たち自身もとても勉強になる回でした。では、ゆっくりどう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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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は美術分野の作家として活動しながら、いくつかの経路を通じて違う国のたくさんの友人たちと出会い交流するようになった。従ってその友人たちをはじめ、時には友達の友達が韓国を訪問するのだが、そのような時ちょうど良い観光コースを一緒にまわったり、おすすめしてあげたりすることが度々あった。当時は私の好きなソウルのカフェや飲食店、美術館、市場をおすすめしたり、一緒に訪問したりした。気を配ってちょうど良いと思える場所を時間や動線を考慮して合理的におすすめをしたが、毎回そんなに個性があるわけでもなかった。条件が許せば、客観的な情報によって、人気の高い観光地ではない、主観的に私が韓国を見る様子を見せたかったが、それならば果たしてその場所がどこなのかということを考えてみることになった。そうこうするうちに、何年か前から確固たる「あ、そうだ。ここならどうだろう?」と思える場所があったのだが、そこは他ならない東大門総合市場だった。私が韓国で創作をしながら、最もたくさん訪問し、またインスピレーションを受けている場所を作家の友人たちに紹介するのがいいのではないかと考えた。もちろん、心の準備を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程、とてもたくさんの種類の品物があり、そのくらい膨大なスケールの空間なので、ぐっと自信を持って連れて行くことが私にも相手にも負担がかかったりするのだけれど、相手にとって必要かどうかや好奇心の程度によって、経験させてあげたい欲望が生まれる空間だ。大部分が美術領域の友人たちであることを鑑みると大きな無理はないようだし、また必ずしも美術分野に参加してはいなくても関心がある人ならば誰でも訪問してみるようにすすめたい。その理由はなんなのか、私がなぜそう思うようになったのか、お話してみようとおもう。

東大門市場の歴史と発展

場所を紹介する前に、東大門総合市場が属する東大門市場の歴史的変化を探ってみよう。ソウル東大門市場は、1905年7月に開設された、というか18世紀前半にすでに大きな規模の市場がソウルの所々に存在していた。代表的なものが東大門市場と南大門市場だが、清渓川を基準とした以南の明洞と南大門市場は日本の商人たちが主導し、彼らは明洞・忠武路・南山一帯に移住して自分たちの基盤を耕し暮らした。日本の商人たちは1900年以降、清渓川以北の鍾路地域まで越えようとしていたが、韓国の商人がこれに対抗するため、自ら蓄積した資本で東大門市場を創立し、経営をすることになる。そして、東大門市場(旧地名はペオゲで、今の鍾路4街禮智洞<イェチドン>にあった)は土着民族資本による商圏形成という意味を持つ。1905年に創立した東大門市場の母体である廣蔵(カンジャン)株式会社は反物商をしながら大きな富を築きあげた何人かの商人が創立し、この会社が市場の運営を主導した。市場が開設された年の11月に市場の管理のため、廣蔵(カンジャン)株式会社が設立されてから、廣蔵市場とも呼ばれた。その一帯にいくつかの商店街が生まれて、特に1970年12月鍾路6街、東大門の向かい側に既存の東大門市場より規模がはるかに大きな東大門総合市場が開設されたことで現在の東大門市場は鍾路5〜6街一帯の全体の商店街を指すようになり、過去の東大門市場は廣蔵市場に限定されることになった。(現在、廣蔵市場は食べ物を売る有名な観光地域として位置付けられている)1960年代経済難を克服するため、輸出主導型繊維工業の重要性が台頭し、このような政策に後押しされて衣類製造業は量的に急速に膨らむことになった。これによって、衣類製作と卸売業態が密集した平和市場が急速に成長、このことが東大門一帯が衣類流通の中心地として大きくなっていった背景だということができる。

1950年代平和市場のすぐ向かい側に開設された東大門総合市場は、生地の生産と流通をはじめとし、副資材の生産と流通まで可能になったので、この調和が現在まで命脈を受け継ぎ、衣類及びアクセサリー制作に関心のある人々なら誰でも訪問すべき独歩的な場所となった。しかしこの時に至るまで、衣類市場の中心は南大門市場だった。南大門と明洞一帯は、腕のいい針仕事をする高級な衣類を生産する場所として、おしゃれな紳士淑女が訪れるところと見なされている反面、東大門は品質やデザインが一段階下だという認識が強かったのだが、主に南大門で生産される服をコピーして値段を安くして普及し、庶民たちの服を大量に生産して販売する場所としてみなされた。この頃とてつもない発展の裏では、平和市場で仕事をしていた縫製労働者たちの劣悪な労働環境が問題になり始めた。縫製工場として使われていた2、3階を生産力増大の理由としてメゾネットに改造し、埃の飛び交う空間で休むことなく縫製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たばこが200ウォンだった時節に、1日100ウォンにもならない賃金で休み時間もなく、1日13〜16時間まで働く状況にまで至った。

このような最悪の労働環境の中で、1970年11月13日大韓民国労働運動史の中で欠かすことのできないチョン・テイル焼身事件が起こった。平和市場の縫製労働者だったチョン・テイルが「勤務基準法を遵守しろ」「私たちは機械ではない」という叫びとともに、自らの身体にガソリンを撒き命を絶ったこの事件は、社会的に大きな波紋を広げ、このことを契機として衣類製造労働者が組織的に労働運動を広げて自分たちの勤務環境を持続的に改善していった。1980年代序盤から平和市場は変化した。販売量増進のため、昌信洞、将忠洞など平和市場に隣接する別の住居地域へ縫製工場の位置を拡散させ、徐々に下請けの方式で生産をした。現在もこの一帯に、縫製工場がたくさん存在している。

私の記憶の中にある東大門市場は、1990年代後半から2000年代序盤まで盛行だった多くの小売店がひとつの建物に集まり、ショッピングセンターを成す形態の市場の典型だ。斗山タワー(Doota)、ミリオレを筆頭に多様なショッピングモールブランドが衣類市場を揺さぶり、当時若いデザイナーたちの覇気と生産基地としての東大門市場、そしてTV広告を通じて新しい広報戦略が混ざり合う、本当に旋風的な反響を駆り立てた。中学生だった私も、好奇心で試験が終わった記念に1、2回訪問した記憶がある。 そのように数年間人気を維持したが、その後2000年代後半SPAブランド(speciali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とは、アパレル分野を中心として小売業が製造の分野まで踏み込み、オリジナル商品の開発を行い自社で販売をする方法。)の登場で、品質に比べて安い価格に押された。 また、特有の親切でない商人たちの行動が噂になり、価格に対比したサービスと質についての否定的な評価で、急激な下落傾向を経た。 その余波で、現在も大きな脱出口というまでもなく、空いている店舗が40%に達し、その時の栄光は見当たらない。しかしひとつの時節を風靡したショッピングセンターの威力はないが、平和市場と隣接する卸小売専門のショッピングモールから、インターネットショッピングモールに納品する製品を販売することで、衣類総合市場としての命脈は受け継がれていると聞いている。このことが私が知っている衣類と関連した全てのこととして認識される、東大門市場の歴史と現実だ。

東大門総合市場を訪問するなら

先ほど紹介したことが客観的な東大門市場の歴史だとしたら、現在の私と関連が深い場所は、中程でしばし話をした東大門総合市場(東大門ショッピングコンプレックス)だと言える。東大門総合市場は、元々の東大門市場、平和市場に比べるとその歴史が浅いが、全国最大の生地(原反)専門商店街として、約2500余りの店舗がある。東大門総合市場は1969年に開場した原反、副資材の総合商店街として、ソウル鍾路区鍾路272に位置し、生地類、衣類副材料、手芸品や編み物用品、カーテンなどのような繊維及び衣類関連、アクセサリー、婚礼用品の売り場がある。階別に写真を見ながら、もう少し説明をしてみる。

市場の建物の入り口

市場案内図

5階 
各種真珠、原石、クリスタル、リボン、スパンコールなど副資材の商店街

3、4階 
生地(ショッピングモール取引先専門)商店街

2階 
韓服の布、オーガンジー、レースなど各種付属生地の専門商店街

1階 
各種リボン、ボタンなどの副資材及び、一部の布(原反)総合及び、婚礼用品売り場

地下1階
編み物用品、カーテン

写真に収めたものはほんの一部で、店舗数自体も多いけれど、それよりも(建物が)A,B,C,D洞として区分されているかと思えば、全てつながっている構造に適応するのが難しい。また、現在は旧館に続き、新館を増築し、その複雑さが一層加わったし、私はやはりその変化を目撃したのだが、現在店舗がぎっしりつまった新館は(私の記憶が正しければ)10年前から徐々に増築され、現在の様子を備えた。私は、20代の初めの頃からいろいろな材料を求めて5階の副資材の商店街をよく訪ねていたので、この環境に比較的慣れている方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周辺に同じような勉強(美術)をしている友人たちは皆、口をそろえて東大門総合市場の膨大感と欲しいものを探すときの疲労感について吐露したりした。普通、特定分野のものや創作に必要なものを探すために訪問する人たちは、東大門総合市場の膨大な規模と種目の多様性に圧倒されがちなので、時間と努力をもって市場を制覇してみようという気持ちがなかったら、なかなか(この場所は)親しみにくい。いくら度々訪問したとしても、私の一生のうちで市場全体を隅から隅まで見ることができるのだろうか?

最近私はプロジェクトのグッズ製作または編み物の用品を購入するために、地下一階に行くことが多い。特に地下一階、地上一階そして5階は私の創作ととても密接な場所で、5階は私のプロジェクトの中のひとつ「Dance ,seriously」(アクセサリーの創作ブランド)に使用している副資材を主に購入するところで、1階からは多様な材料からインスピレーションを得て、地下では創作に必要なグッズを製作する時、いろいろややこしい縫製の作業をしてくださる社長さん(女性の場合がほとんど)と一種のパートナーシップを持ってよく訪ね、製作の依頼をする場所でもある。かなりの皆さんがいらっしゃるが、一番意思疎通ができて期限や仕上げ作業に失望することのない方々と交渉することは、多様な社長さんたちとの何回にも渡るコミュニケーション体験を通じてだけ可能なことだ。やはり試行錯誤をして出会ったお一人の社長さんと、おととしから協業をしている。こうしたいと望む創作物があったら、スケッチやサンプルを制作していき、希望の単価の上限や製作の期限などを決め、作業をしてくださる方と充分に相談をして行われる。(訪問時のひとつのティップス:市場に慣れたとしてもはじめはとても難しいので、店舗ごとに号数の書かれた看板を写真に撮っておくか、名刺を保管しておいて再訪する時に店舗を探す手助けとして使用することをおすすめする)

こうして市場を紹介することだけでも、実はやっぱり胸がいっぱいになる。20年越しでここに通っていても(東大門総合市場を)マスターしたという自信のない一人の人間として、なぜこんな考えに至るのか、明確な理由はわからないけれど、実はこの場所の持っている、一種のオーラが私がこの場所を紹介したかった理由だ。韓国が経済的な成長を遂げるまで、実質的な原動力、その後ろにある痛々しい様子、そしてある見方では大韓民国経済成長の過去と現在を睨み、最も集約的にそれを見せてくれて、今でも速度感を持って生きているこの場所のエナジーを共有したいということなのだ。また、この場所を基本としてこの向こうにある韓国を理解し、新しい見方をしてもらえたらという願いもある。この場所は訪問する外国人たちに、優しく柔らかい雰囲気で記憶を残してくれる場所ではない。難しく、混乱させられた記憶になるかもしれない。ソウルの中心に位置するこの広い建物たちは、ひとつの歴史があったし、その熾烈な生き方が今でも続いているという点に、私でさえ驚かされることが多い。でも「濃い」韓国と出会いたい誰かがいたら、私は東大門総合市場に訪問することをおすすめする。もちろん、私と一緒に行くのもいい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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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술분야 작가로 활동하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다른 나라의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교류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친구들을 비롯해 때로는 친구의 친구가 한국을 방문하곤 했는데 그럴 때 적당한 관광 코스를 함께 가거나 추천해 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당시에는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카페와 음식점, 미술관, 시장을 추천하거나 함께 방문하곤 했다. 마음을 써서 적당하다 여겨지는 장소들을 시간이나 동선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추천했었지만 매번 그렇게 개성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객관적인 정보에 의한 인기 많은 관광지가 아닌 주관적으로 내가 한국을 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곳이 어디일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확고하게 아, 그래, 여기라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드는 장소가 있었는데 바로 동대문종합시장이다. 내가 한국에서 작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방문하고 또 영감을 받는 장소를 작가인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야할 만큼 아주 많은 종류의 물건들이 있고 그만큼 방대한 스케일의 공간인지라 덜컥 자신 있게 데리고 간다는 것이 나에게나 상대방에게나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상대의 필요나 호기심 정도에 따라서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공간이다. 대부분 미술 영역의 친구들인 것을 감안하면 큰 무리는 아닐 것 같고 또 꼭 미술분야에 몸담지 않아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방문해 보도록 권하고 싶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이야기해보겠다.

동대문시장의 역사와 발전

장소를 소개하기에 앞서 동대문종합시장이 속한 동대문시장의 역사적 변화를 살펴보자. 서울 동대문시장(東大門市場)은 1905년 7월에 개설되었다고 하나, 18세기 전반에 이미 큰 규모의 시장이 서울 곳곳에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인데, 청계천을 기준으로 이남인 명동과 남대문시장은 일본 상인들이 주도했고 이들은 명동, 충무로, 남산 일대에 이주해 자신들의 터전을 일구고 살았다. 이들이 1900년 이후 청계천 이북인 종로지역까지 넘어오려던 차, 우리나라 상인들이 이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축적한 자본으로 동대문시장을 설립하고 경영하게 된다. 그리하여 동대문시장(옛 지명은 배오개이고 지금은 종로4가 예지동에 있다)은 토착민족자본에 의한 상권 형성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1905년 설립된 동대문시장의 모체인 광장주식회사(廣場株式會社)는 포목상을 하며 큰 부를 일궜던 몇명의 상인이 설립했고 이 회사가 시장 운영을 주도했다. 시장이 개설되던 해 11월에 시장 관리를 위해 광장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부터 ‘광장시장’이라고도 불렸다. 그 일대에 여러 상가가 생기고, 특히 1970년 12월 종로6가 동대문 맞은편에 기존의 동대문시장보다 규모가 훨씬 큰 동대문종합시장이 개설됨으로써, 현재의 동대문시장은 종로5~6가 일대의 전체 상가를 가리키며, 과거의 동대문시장은 광장시장에 한정되고 있다(현재 광장시장은 먹거리를 파는 유명한 관광지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60년대 경제난 극복을 위해 수출주도형 섬유공업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러한 정책이 뒷받침돼 의류제조업은 양적으로 급속하게 팽창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의류 제작과 도소매 업체가 밀집된 평화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이것이 동대문 일대가 의류 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평화시장 바로 건너편에 개설된 동대문종합시장은 원단의 생산과 유통부터 부자재 생산과 유통까지 가능해지니 이 조화가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가며 의류 및 액세서리 제작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방문해야하는 독보적인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의류시장의 중심은 남대문시장이었다. 남대문과 명동 일대는 솜씨 좋은 바느질로 질 좋은 고급 의류를 생산하는 곳으로 멋쟁이 신사와 숙녀가 찾는 곳으로 여겨졌던 반면 동대문은 품질이나 디자인이 한 단계 아래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주로 남대문에서 생산되는 옷들을 카피해 값싸게 보급하는 서민들의 옷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판매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이즈음 엄청난 발전 이면에서는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봉제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봉제공장으로 쓰던 2, 3층을 생산력 증대를 이유로 복층으로 개조해 먼지 날리는 공간에서 쉴새 없이 봉제노동을 해야만 했다. 담배가 200원이던 시절 하루 100원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휴식시간도 없이 하루 13~16시간을 일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최악의 노동환경 속에서 1970년 11월 13일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태일 분신 사건이 일어난다. 평화시장 봉제노동자였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라는 외침과 함께 온몸에 휘발유를 뿌려 분신 자살한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이것을 시작으로 의류 제조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노동운동을 펼치며 자신들의 근로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해간다. 1980년대 초반부터 평화시장은 변화한다. 판매량 증진을 위해 창신동, 장충동 등 평화시장 인근의 다른 주거지역으로 봉제공장들의 위치를 확산시켜 점차 하청의 방식으로 생산한다. 현재도 이 일대에 봉제 공장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내 기억 속 동대문시장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성행했던, 수많은 소매점들이 한 건물에 모여 쇼핑센터를 이룬 형태의 시장의 전형이다. 두산타워, 밀리오레를 필두로 다양한 쇼핑몰 브랜드들이 의류시장을 흔들었고 당시 젊은 디자이너들의 패기와 생산기지로서의 동대문시장, 그리고 TV 광고를 통한 새로운 홍보 전략이 어우러져 정말 선풍적인 반향을 몰고 왔다. 그래서 중학생이었던 나도 호기심에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한두 번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몇 년 인기를 유지하다가 이후 2000년대 후반 SPA브랜드의 등장으로 품질대비 저렴한 가격에 밀렸다. 또한 특유의 친절하지 않은 상인들의 행태가 소문이 나면서 가격대비 서비스와 질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급격한 하락세를 겪었다. 그 여파로 현재도 큰 탈출구라고 할 것이 없이 비어있는 점포가 40%에 달하며 그때의 영광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한 시절을 풍미했던 쇼핑센터의 위력은 없지만 평화시장과 인근 도소매전문 쇼핑몰에서 인터넷 쇼핑몰에 납품하는 제품을 판매함으로써 의류종합시장으로서의 명맥은 이어져 내려오는 것으로 알고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의류와 관련한 모든 것으로 인식되는 동대문시장의 역사와 현실이다.

동대문종합시장을 방문한다면

앞서 소개한 것이 객관적인 동대문시장의 역사라면 현재의 나와 관련이 깊은 장소는 중간에 잠깐 이야기 나온 동대문종합시장(Dongdaemun Shopping Complex)이라고 하겠다. 동대문종합시장은 원래의 동대문시장, 평화시장에 비하면 그 역사가 짧지만, 전국 최대의 원단 전문 상가로 약 2,500여 개의 점포가 있다. 동대문종합시장은 1969년에 개장한 원단, 부자재 종합상가로 서울 종로구 종로 272에 위치해 있으며 원단류, 의류 부자재, 수예품이나 뜨개, 커튼 등과 같은 섬유 및 의류 관련 액세서리, 혼수용품 매장이 있다. 층별 사진을 보고 조금 더 설명해 보겠다.

시장건물입구   

 시장안내도

5층
각종 진주, 원석, 크리스탈, 리본, 시퀸스 등 전문 부자재 상가

3.4층
원단(쇼핑몰 거래처 전문) 상가

2층
한복 천, 오간자, 레이스 등 각종 부속 원단 전문 상가

1층
각종 리본, 단추, 등 부자재 및 일부 원단 종합 및 혼수용품 매장

지하 1층
뜨개, 커튼

위의 사진에 담은 것들은 극히 일부로, 점포 수 자체도 많지만 그보다 A, B, C, D동으로 구분되는가 하면 모두 연결된 구조가 적응이 어렵다. 또 현재는 구관에 이어 신관을 증축해 그 복잡함이 한 층 더해졌고 나 역시 그 변화를 목격했는데 현재 점포가 가득 들어찬 신관은 (내 기억이 맞다면) 10년 전부터 서서히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여러가지 재료를 구하기 위해 5층 부자재 상가를 자주 다녔기 때문에 이 환경에 비교적 익숙한 편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에 같은 공부를 하는 친구들 모두 입을 모아 동대문종합시장의 방대함과 원하는 물건 찾을 때의 고단함을 토로하곤 했다. 보통 특정 분야의 물건이나 작업에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동대문종합시장의 방대한 규모와 종목의 다양성에 압도되기 일쑤고, 그러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시장을 정복해보겠다는 마음이 아니라면 좀처럼 친숙해지기 어렵다. 아무리 자주 방문한들 과연 내 평생에 시장 전체를 섭렵할 수 있을까?

최근 나는 프로젝트 굿즈(goods) 제작 또는 뜨개용품 구입을 위해 지하 1층에 가는 일이 많다. 특히 지하 1층과 지상 1층 그리고 5층은 나의 작업과 아주 밀접한 곳인데, 5층은 나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Dance, Seriously’에 사용하는 부재료를 주로 구입하는 곳이고 1층은 다양한 재료로부터 영감을 얻으며, 지하는 작업에 필요한 굿즈를 제작할 때 여러가지 까다로운 봉제 작업을 해주시는 사장님(여성인 경우가 대부분)과 일종의 파트너십을 가지고 자주 찾아 뵙고 의뢰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꽤 여러분이 계시지만 가장 의사소통이 잘 되고, 기한이나 마무리 작업에 실망이 없는 분들을 섭외하는 것은 다양한 사장님들과의 여러 번의 커뮤니케이션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나 역시 시행착오 끝에 좋은 사장님 한 분을 만나 재작년부터 꾸준하게 협업하고 있다. 원하는 작업이 있다면 스케치 또는 샘플을 제작해 가서 원하는 단가의 상한선, 기한 등을 정해서 일 해주실 분과 충분한 상의를 거쳐 이뤄진다(한 가지 방문 팁: 시장에 익숙하다 해도 초반에는 많이 어려울 테니 점포마다 호수가 간판으로 적힌 것을 사진을 찍어 두거나 명함을 보관해 다시 방문할 때 찾는 용도로 사용할 것을 추천한다).

이렇게 시장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꽤 벅찬 마음이 든다. 20년 넘도록 다니면서도 정복했다 말할 자신조차 없는 한 사람으로서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실은 이 장소가 지닌 어떤 아우라(aura)가 내가 이곳을 소개하고 싶어하는 이유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기까지 실질적인 원동력이자 그 뒤의 아픈 모습, 그리고 어떤 시각에서는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과거와 현재를 켜켜이,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며 아직도 속도감 있게 살아있는 이 장소의 에너지를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이 장소를 기반으로 이 너머의 한국을 이해하고 새롭게 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곳은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부드럽고 상냥한 분위기로 좋은 기억을 남겨줄 곳은 아니다. 어렵고 혼란스러운 기억일 수도 있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이 낡은 건물에는 어떤 역사가 있었고 그 치열한 삶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나조차 놀랄 때가 많다. 그럼에도 ‘진한’ 한국을 보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동대문종합시장에 방문하길 권한다. 물론 나와 함께 가는 것도 좋겠다.

ソ・ダソム

서다솜
ソ・ダソム
1984年12月生まれ。
視覚芸術家

2007年3月 梨花女子大学 造形芸術大学 陶磁芸術専攻学士
2013年3月 ベルリン フンボルト大学交換留学生
2014年8月 梨花女子大学教員養成大学 教育大学院美術教育専攻修士

<経歴と活動>
2017年
・メキシコ メキシコシティにて
クラトインベルティド レジデンス入居作家(韓国文化芸術委員会後援)
・香港・Kong Galleryにて
ワークショップ “A Hundred Moons”

2018年
・韓国 光州 5.18記念文化センターにて
5.18記念文化財団 国際学術大会発表者「民衆美術,失敗で定義できない多衆の力」
・韓国 光州 アジア文化財団
ACC創作空間ネットワーク フィリピンパビリオンコーディネーター
・韓国 光州 ホットハウスにて
2018光州ビエンナーレ フィリピンパビリオン コーディネーター
・ノルウェー、スウェーデン、デンマークにて
北ヨーロッパ招待リサーチ(OCA ダニッシュアートカウンシル後援)

2019年
・韓国 光州にて
光州ビエンナーレパブリックリサーチプログラム 参加作家
ワークショップ “A Locality Observation in Gwangju”
ワークショップ “手にしたものはなんですか?”

2020年
・韓国 光州 ポボ食堂にて
ワークショップ “山のお菓子”
3人展「先に言う招待の言葉」企画、参加作家
団体展 “Amoeba” 参加作家

2021年
・韓国 釜山 芸術地球Pにて
個人展「失礼します、この近所にもしかして花屋さんはありますか?」
釜山 芸術地球Pレジデンス 入居作家

2022年
・韓国 光州 ヘユムにて
個人展「生きること、食べること、寝ること」
光州文化財団地域文化芸術特性化支援事業支援作家
・イタリア ベニス Spazio Berlendisにて
光州ビエンナーレ 5.18ベニス特別展示「花の咲く方へ」参加作家